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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성골 코스 ( 대성교 → 세석산장 )

다우리산사랑 2007. 4. 27. 23:58
대성골 코스 ( 대성교 → 세석산장 )

대성골 코스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정갈한 맛의 협곡

대성교 or 의신마을 ▶1㎞▶ 절터 ▶1㎞▶ 대성리 ▶4㎞▶ 작은세개골 ▶1㎞▶ 큰세개골 ▶3㎞▶ 1,400m갈림길 ▶0.5㎞▶ 음양수샘 ▶1㎞▶ 세석입구 ▶0.5㎞▶ 세석산장

 


대성골의 등반은 대성교나 의신 마을에서 시작된다.  세석까지는 계곡과 능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 짙푸른 수해속으로 파묻히다가 다시 탁 트인 전망으로 이어지는 등반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세석까지는 12 km이고, 대성동 계곡에 큰 폭포나 소나 별로 눈에 안띄어 경관은 뒤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때묻지 않은 느낌을 주는 계곡 중의 하나이다. 하동 구례방면에서 화개를 거쳐 진입하게 되므로 시간만 주어진다면 화개동천 주변의 명승과 역사의 숨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성골 코스는 의신마을(경남 하동군 하개면 대성리)이나, 대성교(대성계곡이 하개천에 합류디는 지점)에서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12km의 산길이다. 쌍계사 방면에서 삼신봉을 거치지 않고 더 빨리 세석고원으로 오를 수 있는 코스이다. 전체거리 12㎞가 만만치는 않지만, 큰세개골 ∼1,400m 갈림길 구간의 비탈길 답파가 부담이 따를 뿐 나머지는 무난하게 운행할 수 있다. 이 코스도 큰세개골이 폭우로 물이 넘칠 때는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장마철에는 찾지 않는 게 좋다. 전체적으로는 이 구간의 숲이 시원하고, 절반 가량은 대성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걷게 된다.
대성골 코스의 산행 기점은 대성교 또는 의신마을인데, 두 길이 합류되는 절터까지는 거리가 꼭같이 1㎞이다. 그러나 대성교는 첫 발걸음부터 가파른 능선길로 따라가야 하므로 의신마을의 평탄한 코스가 훨씬 수월하다. 의신마을은 화개동천 노선버스의 종점이다.
대성교가 걸려 있는 곳에서 계곡 남쪽 비탈 쪽으로 샛길이 나있는데, 이 길은 대성계곡 본류를 따라가는 비밀통로이다. 대성계곡에 물이 범람하지 않으면 이 길을 따라 문바위(대성동 가게집)까지 갈 수 있다.
대성교∼문바위의 대성게곡 하류는 백옥같은 반석에 아름다운 선경이 보석처럼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고 위험한 산비탈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어 함부로 접근하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일반 등산로가 아니고, 치성객이 주로 드나드는 비밀통로이다.

곳곳에 움막터 흔적

의신마을은 지난날 의신사(義神寺)가 자리했던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임진란 당시 전란을 피해 찾아들어왔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한때 130여 가구에 이르기도 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전란의 피해를 여러 차례 겪었다. 현재는 40여 가구 170여명이 살고 있다. 종래 이 마을 주민들은 주로 산간영농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으나, 근래는 외래객을 상대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성교∼의신마을 진입도로는 2차선으로확장되어 포장까지 완료했다.
이 마을 주민 가운데는 지리산의 거미줄과도 같은 옛 오솔길 등을 손금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운해 산장의 조봉문, 지리산 산장의 우정용, 산악인의 집의 정용환, 그리고 정근수가 그들이다. 이들에게 길 안내를 받게 되면 아주 색다른 코스도 찾아볼 수 있다.
의신마을에 솟대가 서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대성골 코스의 길이 시작된다. 이 산길은 산비탈을 따라 비스듬히 돌아가는데 과수를 심어놓은 밭이 주변에 나타난다. 오솔길은 평탄하게 몇 차례 산구비를 돌아간 뒤, 키 큰 감나무 그늘에 평상이 놓여 있을 때도 있는데, 그 아래 샘물이 맑게 솟아나오고 있다.
절터라 불리는 이곳은 지난날 능인사(能仁寺)가 자리했다. 샘물을 마시면 장군이 된다는 전설의 장군샘이 이 절터에 있었는데, 현재는 공터 안쪽편에 매립 상태로 묻혀 있어 샘물을 구할 수가 없다.
절터에서 대성동 가게집까지는 대성계곡을 오른편에 끼고 밤나무 숲 사이로 산길이 이어져 있다. 산길 좌우편에 공부하는 사람의 초막이 띄엄띄엄 목격된다. 대성골은 우난히 집터 흔적이 많다. 원 대성마을은 현재의 대성동 가게집이 있는 곳보다 4㎞나 더 들어간 산골에 있었는데, 독가촌 정비 때 현재의 대성동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지금도 원 대성마을 주변 골짜기에는 초막 등이 들어서 있고, 그곳에 치성객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대성동 가게집은 근래 작고한 임봉출노인이 후박나무 등 많은 나무를 심어 조림 왕국을 이룩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고, 민박도 열고 있다. 가게집 뒤편 후박나무 사이의 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살림집을 비롯한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있다. 산길을 바삐 따라가면 그 집들이 보이지 않는다.

빨치산 진압 때 불바다

대성동 문바위에서 작은세개골, 큰세개골에 닿는 5㎞의 숲길은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구간이다. 산길은 완만한 평지를 지나가듯이 편편하게 이어졌는데, 바른편의 대성계곡은 급경사 아래편에 위치한다. 또한 참나무 숲이 빼곡하게 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계곡을 건너는 곳은 작은세개골과 큰세개골 두 곳이다. 큰세개골은 기암괴석이 자리하고 작은 폭포까지 있는 넓은 하상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물길이 넘칠 때는 건너는데 위험이 따른다.
대성동∼큰세개골 5㎞는 앞과 뒤가 꽉 막혀 언제나 적요한 느낌이 앞선다. 이 골짜기가 안고 있는 적막감은 빨치산 토벌 때의 처절했던 상황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부터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인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군 토벌대가 눈속을 헤집고 공격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국군 토벌대가 코 앞에 닥쳤을 때는 반격을 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쳐 밤새도록 쫓겨 대성골로, 대성골로만 몰려든 것이다.‥‥‥ 의신부락 뒤쪽에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 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때의 대성골은 밤낮으로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 순덕은 시뻘건 불바다 속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절벽 밑의 바위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순덕은 몇날 며칠을 바위 틈새에 갇혀 서있는 채로 지내야 했다.'

이상은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3기 토벌작전 때 대성골에 몰렸던 빨치산이 궤멸적 타격을 입는 상황을 묘사한 '실록 정순덕'을 요약한 것이다. 정순덕은 빨치산 1만여명이 이곳에서 궤멸하다시피 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당시 지리산 전체의 빨치산 숫자가 1,000명에도 못미쳤기 때문에 과장된 얘기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마치 토끼몰이 하듯이 지리산 곳곳의 빨치산들을 대성골로 몰아붙여 강력한 화력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만은 틀림없다. 빨치산의 그 절박했던 상황은 현재의 적요한 대성골에선 거짓말처럼 단지 묻혀 있기만 할 따름이다.

지루한 비탈길 3㎞

큰세개골을 건너 등산로는 오른쪽 비탈길로 올라선다. 이곳에서 나부능선상의 1,400m 갈림길에 이르는 3㎞ 비탈길이 가파르고 힘든 구간이다. 처음에는 질퍽거리는 흙길이 있는가하면, 사나운 돌발길로 바뀌기도 하고, 꽤나 미끄러운 급경사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돌발길 왼쪽으로 작은 지류가 한 때 나타나는데, 그 뒤로는 음양수샘까지 식수를 구하지 못한다.
큰세개골은 대성계곡 본류이다. 이 계곡을 게속 따라오르면 대성폭포와 만나고, 이윽고 영신대에 닿게 된다. 그러나 큰세개골∼영신대는 정상적인 산길이 없기 때문에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동해하지 않으면 찾아가기 어렵다.
큰세개골에서 영신대를 찾을 때는 계곡을 치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산길을 200m 가량 오른 뒤 왼편 숲 속으로 들어가 지류를 건너간다. 한동안 숲 속을 헤치고 나가면 그 때 부터는 게곡을 따라 무난하게 전진할 수 있다.
대성게곡 본류에 숨겨진 대성폭포는 지도에도 표시가 돼있지 않고, 이곳에 이르는 산길 표시도 없다. 그러나 의신마을 주민들은 단체로 상춘놀이를 즐기는 곳으로 이 폭포를 자주 찾을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 현지 주민들 사이에는 '선유폭포'라고도 불리는 대성폭포는 그 규모가 놀라울 만큼 장대하며, 이 폭포에 이르는 계곡 주변은 설악산의 산세를 옮겨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대성폭포가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비경은 숨겨놓는 것이 진정하게 아낄 수 있는 길일 것도 같다. 대성폭∼영신대 코스를 찾을 때는 의신마을 주민의 길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대성골 코스는 대성폭포와는 전혀 관계없이 남부능선상의 1,400m 갈림길로 이어진다. 이곳부터는 남부능선을 따라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것과 같은 길을 밟게 된다.

음양수샘의 애틋한 전설

음양수샘과 세석고원 철쭉은 같은 전설로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아득한 옛날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호야(乎也)라는 남자와 연진(連眞)이라는 여자로 이들이 처음 들어와 산 곳은 대성계곡이었다.
다정다감한 그들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씨족사회의 엄한 규율과 인습의 굴레를 벗어나 지리산 대성계곡에서 보금자리를 열었다. 그들은 산채나 산과를 따서 배부르게 먹고 한쌍의 원앙새와 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슬하게 자녀를 두지 못한 것이다. 어느날 남편이 산과를 따기 위해 산골 깊이 들어가고 없는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던 검정 곰이 연진여인을 찾아와 위로하며 말했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 이 말을 들은 연진여인은 너무 기뻐서 남편과 상의할 사이도 없이 혼자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 기적의 물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평소 곰과 사이가 좋지못한 호랑이가 곰과 연진여인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엿듣고 이를 그대로 지리산 신령께 고해바쳤다. 산신령은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게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마신 연진여인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려 잔돌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서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그날부터 연진여인은 뜻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어 철쭉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졌다. 연진여인은 슬품에 젖어 눈물과 닳아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었다. 세석 철쭉은 연진여인의 애처러운 모습을 닮아 그처럼 청초하고 아름답다. 또 연진여인의 술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애련하게 해마다 피고지고는 한다. 연진여인은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황봉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닥 그대로 돌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바로 가련한 연진여인의 굳어진 모습 그것이라고 한다.'

음양수샘과 세석고원의 철쭉, 그리고 촛대봉의 앉은 바위에 이르는 전설이 이처럼 한 이야기 속에 포함돼 있다.

하산 코스 선택 신중히

대성골 코스는 전체 거리 12㎞로 등정 시간 5시간, 하산 시간 3시간 30분 가량이 소용된다.
세석고원에서 하산 코스로 대성골 루트를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 겨우 체력 상태나 날씨 등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신중하게 해야 한다.
전체 거리가 거림골 코스보다 4㎞나 더 멀고, 비탈길과 돌바티길에서 의외로 많은 체력 소모를 경험할 수 있다. 세석고원에서 1박한 뒤 아침에 출발할 경우에는 대성골 하산길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겠으나, 천왕봉 등정 등을 끝내고 지친 상태에서 대성골 루트로 내려서면 긴 골짜기가 지옥처럼 멀리 생각될 수도 있는 법이다.
또 대성골은 협곡으로 좌우편이 산비탈에 꽉 막혀 있기 때문에 일몰 시간 이후에는 아주 깜깜한 어둠의 천국으로 돌변한다. 야간산행으로 이어질 것에 대비하여 조명기구를 잘 갖추어야 한다. 또 큰세개골, 작은 세개골의 계곡물이 넘칠지도 모르는상황에 유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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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즐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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