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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원사 코스 ( 평촌리주차장 → 천왕봉 )

다우리산사랑 2007. 4. 27. 23:57

대원사 코스 (단풍과 설경이 만점인 동쪽 능선의 대장정)

코스1
평촌리주차장2㎞▶ 대원사 ▶2㎞▶ 유평리 ▶5㎞▶ 새재마을 ▶5㎞▶ 920m갈림길 ▶1㎞▶ 무제치기폭포 ▶2㎞▶ 치밭목산장 ▶6㎞▶ 중봉 ▶2㎞▶ 천왕봉

코스2
평촌리주차장2㎞▶ 대원사 ▶2㎞▶ 유평리 ▶5㎞▶ 920m갈림길 ▶1㎞▶ 무제치기폭포 ▶2㎞▶ 치밭목산장 ▶6㎞▶ 중봉 ▶2㎞▶ 천왕봉

● 신밭골 코스 총거리: 23Km
    
신밭골 : 유평리 → 새재마을 → 920 m 갈림길, 거리 10 km  2시간30분

● 한판골 코스 총거리: 18Km
    
한판골 : 유평리 → 920 m 갈림길, 거리 5 km   2시간30분

● 등정시간: 7시간 50분

● 하산시간: 6시간 30분

 


신밭골 코스는 유평리에서 새재마을까지 비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따라서 거리상으로는 5 km 더 먼 편이지만 도로를 이용하므로 걷더라도 시간은 거의 동일하다.


대원사계곡 상류는 조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조개골로도 불린다. 가야말기에 구형왕이 들어와 유평 위 외곡에 나라를 세웠고, 현대사에는 빨치산의 경남도당 자리가 있던 곳이다.

지리산을 아는 사람들은 중산리코스가 아닌 대원사∼치밭목∼천왕봉으로 오르는데 주릉종주 때 많이 이용된다.

대원사 아래 매표소(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는 30분 걸린다. 승용차는 새재마을까지 갈 수 있다. 넓은 길이지만 보도블럭이 깔려 매표소에서 대원사까지는 별 지루함 없이 갈 수 있다. 길에서 계곡 밑을 쳐다보는 맛도 좋고 군데군데 노송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대원사에서 유평리까지는 20분 걸린다.

유평리 왼쪽 외딴집에서 신밭골로 가는 도로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이 골짜기는 한판골로 불리며 상부인고개까지 2시간 걸리는 한적한 코스다. 고개에서 무재치기 폭포를 지나 치밭목까지 계곡을 따라오른다. 1시간30분이 걸린다.

근래에는 승용차로 새재마을까지 와서 완만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널따란 조개골을 거슬러 치밭목까지 코스를 택하는 이들이 많다. 시간 또한 2시간40분 걸려 무재치기폭포코스보다 가깝다. 치밭목산장에서도 옛날은 험하고 굴곡 심한 써리봉 능선을 타고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는데 요즈음은 치밭목산장 뒤로 빠져 조개골 상단의 넓은 계곡을 가로질러 중봉과 하봉 안부로 해 중봉∼천왕봉을 오른다. 이도 써리봉보다 30분쯤 짧은 2시간 걸린다.

20㎞의 장대한 등산로

지리산에서 사람이 사는 골짜기로 제일 깊은 곳인 대원사계곡 코스는 대원사계곡(일명 유평계곡)에서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루트를 일컫는다. 경사가 완만해 가야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룬 곳으로 남원의 달궁계곡과 동서 쌍벽을 이루는 골짜기다.

비구니 사찰인 대원사(大源寺)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한판골, 신밭골, 조개골, 쑥밭재 등의 여러 갈래가 나있으나,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이정표를 세워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곧 유평리에서 한판골을 따라 오르는 '대원사계곡 코스'이다
이 코스는 대원사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무려 20㎞ 50리에 이르는 장대한 루트로 능선을 넘고 또 넘거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등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길이다. 또 소용 시간도 많은 편이므로 치밭목 산장, 또는 그 다음의 장터목 산장이나 로타리 산장에서 1박을 하는 등의 시간계획 수립에 유념해야 한다
대원사는 시천면사무소 소재지인 덕산(德山)에서 중산리 도로와 떨어져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매표소가 지리한 곳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시외버스도 이곳이 종점이다.
이 주차장부터 붉은 보관을 깐 도로를 따라가는데 대원사계곡의 협곡 경관이 빼어나 지루한 느낌이 없다. 이 아름다운 선경은 4㎞나 계속되어 산길이 시작되는 유평리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 중간 지점의 대원사는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져 있는 등 풍치림과 계곡의 선경이 사찰 건물과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다. 비구니사찰로 조용하면서도 깨끗한 분위기의 대원사는 신라 진흥와 9년 (548년) 평원사(平原寺)라는 이름으로 연기조사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그 뒤 숙종11년(1685년) 운권선사가 대원암을 짓기 시작했고, 고종 27년(1890년) 혜혼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다시 페허가 된 것을 김법일스님이 재건했다. 경내에는 지방문화재 30호인 9층 석탑이 남아있다.

심장면 평촌리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20여 km의 계곡과 능선길을 오르는 멀고도 힘든 코스에 속한다. 유평리에서 한판골로 또 새재마을에서 신밭골로 오르는 길이 가장 알려져 있고 부담없는데  때에 따라서는 조개골로 해서 중봉, 치밭목, 쑥밭재 등으로 오르는 희미한 길도  다양하게 잡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초행자에게는 당연히 무리다. 대체로 진주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당일 천왕봉을 거쳐 장터목까지 당도하기에 벅차  중간의 치밭목산장에서 1박하는 것이 일정상 기본틀이다.  평촌리에서 새재마을까지 10 km 거리는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나 있다.

평촌리의 넓은 주차장에서 붉은 벽돌로 포장된 도로를 올라가면  좌우로 협곡을 이룬 지세와 동양화 화폭에서나 봄직한 첩첩이 포개진 산자락,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흰 물줄기가 더욱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첫인상을 우선 강하게 받는다. 산모퉁이 하나 돌아 오른쪽으로 휘어져가면 삼밭골과 물골 사이로 긴 지능선 자락이 계곡물을 가로막듯이 뻗어 내려 대원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면 완만한 계곡과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비포장길이 이어지다가  대원사에 이르며 유평리 본 마을에 올라오면  유명한 가랑잎 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유평마을에서 산길로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은 정부의 국립공원 독가촌 정비 때 생겨난 마을이다.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철에는 차량과 사람들로 크게 붐비지만, 피난주택 같은 가옥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집집마다 민박을 열고 통종닭등의 요리를 파는 것이 주업이다시피하다. 유평국민교가 가랑잎학교란 애칭으로 더 잘 랑려지게 된 것은 운동장에서 가랑잎과 함께 됭구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어느 취재 기자가 이런 이름을 붙였던 데서 유래한다.

유평리 이정표에서 한판골로 오르는 코스와 신밭골로 오르는 코스가 갈라지나이 두 코스는 모두 해발 920m 갈림길에서 만나 치밭목으로 오르게 된다. 비록신밭골코스가 5km 가량 비포장도로를 따라 더 가야 하는 점은 있지만  유평에서 같은 시간에 출발하더라도 갈림길까지는 소요 시간이 엇비슷한 편이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경계,  그 분수령을 이루는 능선 평지에  자리잡은 치밭목산장은 주위에 참나무가 울창하고 고풍스럽기까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지않는 곳이라서 한적하기까지 하다.  주위에 취나물이 많이 난다 하여  치밭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치밭목을 지나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는데 순두류고원이 마치 고공에서 내려다보듯 훤하고  주위에는 온통 기암절벽이 제 생명을 다한고사목과 어울어져 절경을 이룬다. 구곡산 연릉이 아스라이 뻗어있고  여러모로 전망이 훌륭한데 여기서 중봉까지 10리길은 그야말로 스릴만점의 암릉길이다.  써리봉은 바위들 솟은 모양이 마치 '써레'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써리봉 넓은 고대에 올라오면 천왕봉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고  그 옆에 중봉이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다.


유평마을을 지나 200m 쯤 가면 외딴집이 있는데 이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한판골의 지류가 흘러드는 곳이다. 등산로는 이 지류 오른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여기서 계속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데, 다소 파라른데다 시야가 막혀 갑갑한 느낌도 든다. 40분 가량 올라 수량이 줄어든 한판골을 건너게 되는데, 이때부터 20분 가량은 급경사지역이다. 키 큰 수림이 싱그럽기는 하지만, 몇 차례의 급경사 길이 되풀이되며 땀을 흐리게 만든다.
이윽고 전망이 탁 트이는 능선 위로 올라서는데 장당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낟. 이제부터는 급경사를 오른데 대한 보상이라두 해주듯 평탄한 길이 산허리를 감돌아간다. 이 산허리를 돌면 길게 협곡을 이루고 있는 장당골과 들쑥날쑥한 암봉의 써리봉이 멀리 바라다 보인다. 이 산길은 장당계곡을 왼편에 끼고 산허리를 게속 오르락 내리락하며 감도며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대원사 코스는 10년 전 쯤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않아 여름철에는 수풀이 길바닥을 뒤덮는 바람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코스는 지리산 종주산행의 필수 과정으로 생각하는 등산객이 늘어나고, 무인 치밭목 산장에 민병태가 관리인으로 정착한 이후 길바닥도 휜하게 넓혀졌다.
무재치기폭포 1㎞ 못미친 지점에서 920m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바른쪽 편의 능선을 넘어오는 갈림길이 여기서 합류하는데, 새재마을에서 신밭골을 거쳐 오는 길이다. 근래 새재마을 앞의 계곡에 쇠다리가 가설되고 차량 통행이 이 마을까지 가능해지자 한판골 대신 신밭골을 거쳐오는 등산객이 늘어나고 있다. 경관도 신밭골 쪽이 빼어나다.
이 갈림길에서 등산로는 평탄하게 계속되지만, 무재치기폭포 앞의 계곡을 건너는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게곡을 곧장 건너는 것이 아니라 계곡 한가운데의 바위를 타고 얼마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폭포 위 전망대 장관

무재치기폭포는 투박한 암괴가 인상적이다. 무지개를 친다는 뜼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철따라 주변의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름다운 그림을 빚어놓는다. 그러나 3단 폭포로 수맥이 여러 갈래로 퍼져 흘러내리기 때문에 폭포수 자체의 장관을 폭우 때가 아니면 지켜보기 어렵다.
무재치기폭포로 가는 길은 등산로에서 따로 이어져 있다. 폭포 아래까지 갔다가 되돌아나와야 한다. 곧장 폭포 왼쪽의 비탈길로 올라섰을 경우 바른 쪽으로 잠시 숲속길을 따라가 암봉의 전망대를 찾는 것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이 전망대는 아찔한 수직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폭포의 모습이 단연 압권이다.
전망대에서 되돌아나와 다시 계곡을 건너는 10여분 거리의 주변은 모두 야영을 했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계곡을 건넌 뒤로는 다시 숲길이 시작되는데 길바닥은 온통 돌투성이이다. 계곡 바닥인지 길바닥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곳도 있으나 리본을 잘 살펴보면 길을 놓치지 않는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20분 가량 계속된다. 물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치밭목 산장의 개 짓는 소리가 들리면 마지막 힘을 낼 수 있다.
치밭목 산장은 해발 1,400여 m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원사 코스를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곳이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분수령을 이루는 능선 위에 자리 잡은 이 산장은 무인산장으로 버려져 있던 것을 1987년경 진주의 산악인 민병태가 정착하여 관리한 뒤로 가장 모범적인 대피소가 되고 있다.
치밭목은 취나물 등이 많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며, 참나무 숲 아래의 풀밭이 언제나 "싱그럽다. 이 산장에선 원두커피와 작설차의 맛이 뛰어나 인기가 높다. 그러나 산장의 수용능력이 40명에 불과하다. 치밭목샘은 산장 뒤편 200m 지점에 있는데, 이 샘터에서 하봉 헬기장으로 지름길이 연결해 있다. 이 지름길은 민병태가 개척한 것으로 조개골 등반 루트와 중간에서 만나며, 천왕봉 등정때도 이용된다. 이 길은 써리봉을 거치치 않고 중봉을 가게 된다.

써리봉의 절묘한 선경

대원사게곡 코스의 원래 루트는 써리봉을 거쳐서 중봉으로 오르는 길을 따른다. 치밭목 산장에서 부드러운 흙길 능선을 30분 가량 오르면 4㎞의 들쭊날쭉한 써리봉 능선에 닿게 된다.
써리봉은 만장년기의 밋밋한 육산인 지리산 능선 가운데 아주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농기구인 써리의 들쭉날쭉한 톱날처럼 암봉이 높고 낮게 줄을 이어 연결돼 있다. 그 기암괴석이 고사목들과 어울려 절묘한 선경을 빚고 있다. 지리산 8경 가운데 연하봉 선경을 꼽고 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써리봉 선경이 앞서는 것으로 믿고 있다.
써리봉 암릉 10리 길은 지난해 철사다리를 촘촘히 세워놓기 전까지는 통나무나 밧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드릴 만점의 코스였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많은 산악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쇠사다리를 가설했는데, 안전시설물이라 하더라도 원목이나 밧줄만을 이용하여 자연미를 살리는 노력이 너무나 아쉽게 생각된다 쇠사다리를 밟고 가며 이를 탄식하는 산악인들이 적지 않다.
써리봉은 중봉과 천왕봉이 거의 같은 거리로 눈앞에 조망되고, 순두류의 푸른 분지와 황금능선(동남부 능선)과 웅석봉의 웅자가 한눈에 들어노는 등 주변의 산세를 돌러보는 데도 일품이다. 특히 구름띠가 천왕봉 허리를 감쌀 때는 천상의 황홀한 느낌까지 갖게 한다.
써리봉에서 중봉으로 오르는 곳에서 또 한 차례 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다. 전체 코스 20㎞ 가운데 중봉에 서면 18㎞를 주파해온 것이 된다.

'가깝고도 먼 당신'

중봉(中峰)은 해발 1,875m로 지리산에서 천왕봉 다음으로 두번째 높은 준봉이다. 하봉이나 칠선계곡에서 올려다보는 중봉의 위용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이 중봉은 천왕봉과 너무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느낌이다. 지리산 3대 영봉을 일컬을 때도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으로 중봉, 제석봉 등의 높은 봉우리들을 건너뛰고 있다. 중봉이 반야봉처럼 천왕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면 대단한 위용을 자랑할 것이다.
중봉은 천왕봉에 가려 있지만 그 자체의 조망이 뛰어나다. 또 하봉 루트로 산행을 할 때는 이 중봉이 주요 통과지점이자 갈림길이 있어 신경을 써야하는 곳이다.
중봉에서 천왕봉은 너무 가깝다. 눈으로 보면 직선거리가 수백 m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봉과 천왕봉은 그야말로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중봉에서 천왕봉까지 바로 밋밋한 능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잘룩한 안부로 한참 내려간 뒤에 다시 치고 올라야 한다. 체력 소모가 이미 많았던 산꾼들에게는 중봉∼천왕봉의 2㎞가 40분 가량의 땀을 흘리는 악코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봉 안부의 중봉샘은 누군가가 손질 놓으면 또 토사에 덮여버리는 등 온전하지가 못하다. 아예 찾지 않는게 마음 편하다. 또 이 안부에서 날쪽으로 쏟아지는 중봉골(일명 마야계곡)의 등반로가 소개되는 일도 있으나 일반인이 찾기는 무리한 곳이다. 기술등반 장비를 갖춘 전문산악인이 안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현명한 노릇이다.
중봉 안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데는 나무 뿌리를 잡고 매달리다시피하며 올라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겨울철에 천왕봉에서 내려올 경우 상당한 조심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그 곳만 지나면 천왕봉 까지는 20㎞ 장정의 마무리를 한다는 벅찬 감동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발을 옮겨놓아도 좋다.

각급 단체의 소란 행위도

천왕봉은 예부터 우리 민족이 숭앙해온 영봉이었으나, 요즘은 수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수모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다. 각급 단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선 고함지르기 대회를 펼치듯이 소란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또 붉은 깃발 등을 흔들며 격렬한 구호를 외쳐대는 경우도 있다.
천왕봉에선 일찌기 해방 직후의 정국 혼란에 편승하여 여순반란군 패잔병이 지리산에 입산하기 이전에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일이 있다. 훗날 북한 강동정치학원 교관을 역임하고, 남한유격대 총사령관으로 남파된 '마지막 빨치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준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단독총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남로당 등의 북한 동조 세력은 2,7구국투쟁에 이어 5.10단선반대 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선 남도부부대 100명 (일설에는 5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이 천왕봉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5월 10일 봉화를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서 습격, 우익 인사 살해 등의 거사를 계획했다. 이 정보가 경찰에 사전 누설되어 거사 3일 전인 5월 7일 함양, 산청, 하동, 진양 등지의 경찰들이 우익청년들을 이끌고 벌떼처럼 천왕봉을 에워싸고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 때는 피아간에 농기구로 무장한 병력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원시적인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천왕봉에 빨갱이들이 있으니 토벌하러 가야한다기에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우리들은 설마 천왕봉 그 높은 곳에는 빨갱이가 없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히히덕거리며 올라갔던 것이다 총소리가 나자 우리는 삼십육게 놓기에 바빴다."
토벌대에 동원된 한 청년의 진술이다. 이 천왕봉 무장봉기는 짧은 전투 끝에 양쪽 모두 천왕봉에서 퇴각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날의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가을부터 지리산 전역은 장장 7년에 걸쳐 빨치산과 토벌대의 처절한 전장으로 피을 뿌리게 되었던 것이다.
천왕봉에는 이 밖에도 역사의 편린들이 수없이 많이 점철돼 있다. 천왕봉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그 편린의 어느 한 가지라도 가슴으로 의미를 새겨보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즐건^)^
글쓴이 : 즐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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